백범일지( http://ko.wikisource.org/wiki/%EB%B0%B1%EB%B2%94%EC%9D%BC%EC%A7%80 )
에 흥미로운 내용이 있더군요.  추설, 목단설, 북대라는 도적 집단에 대한 이야깁니다.

규모도 크고, 내규도 있고..  어떤 책에서는 춘설(추설이 아님)과 북대라는 조직이 고려의 복건을 위한
조직이고 이가 조선 후기까지 존재했었다고 백범 일지에 나온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위 링크의 백범일지에서는

그 내용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책 저자의 기억 혼선이거나, 아니면, 위의 링크가 전문이 아닐수도(그럴 가능성은 적어보이긴 합니다만...)

조선 시대같은 문민 지배의 빡빡한 사회 계층에서, 좀 흥미롭네요.

=======================  위키디피아의 백범일지 中 추설, 목단설, 북대 부분  =====================

"그러면 어느 계통이시오, 추설이오 목단설이시오? 북대요? 또 행락은 얼마 동안이나 하셨소?"

나는 이게 다 무슨 소린지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추설', '목단설'은 무엇이요, '북대'는 무엇이며, '행락'은 대체 무엇일까? 내가 어리둥절하고 있는 것을 보더니 김 진사는 빙긋 웃으며,

"노 형이 북대인가 싶으오"

하고 경멸하는 빛을 보였다.

내 옆에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죄수 하나가 김 진사를 대하여 나를 가리키며, 나는 국사범 강도라, 그런 말을 하여도 못 알아들을 것이라고 변명하여주었따. 이 자는 찰강도라 계통 있는 도적이었다. 그의 설명을 듣고야 김 진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어째 이상하다 했소. 아까 공장에서 노 형이 강도 15년이라기에 위아래로 훑어보아도 강도 냄새가 안나기에 아마 북대인가보다 하였소이다"

한다.

나는 연전에 양산학교 사무실에서 교원들과 함께 하던 이야기를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세상에 활빈당이니 불한당이니 하는 큰 도적 떼가 있어서 능히 장거리와 큰 고을을 쳐서 관원을 죽이고 전재를 빼앗되 단결이 굳고 용기가 있으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동작이 민활하여 나라 군사의 힘으로도 그들을 잡지 못한단 말을 들었는데, 우리가 독립운동을 하자면 견고한 조직과 기민한 훈련이 필요한즉 이 도적 떼의 결사와 훈련의 방법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하여 두루 탐문해보았으나 마침내 아무 단서도 얻지 못하고 만 일이었다.

사흘을 굶으면 도적질할 마음이 난다고 하지마는 마음만으로 도적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니 거지도 용기와 공부가 필요할 것이다. 담을 넘고 구멍을 뚫는 좀도둑은 몰라도 수십 명, 수백 명 떼를 지어 다니는 도적이라면 거기는 조직도 있고 훈련도 있고 의리도 있으려니와 무엇보다도 두목되는 지도자가 있을 것인즉 수십명, 수백 명 도적 떼의 지도자가 될 만한 인물이면 능히 한 나라를 다스려갈 만한 지혜와 용기와 위엄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김 진사에게 도적 떼의 조직에 관한 것을 물었다. 그런즉 진사는 의외에도 은휘함 없이 내 요구에 응하였다.

"우리 나라의 기상이 다 해이한 이때까지도 그대로 남은 곳은 벌과 도적의 법뿐이외다"

라는 허두로 시작된 김 진사의 말에 의하면, 고려 이전은 상고할 길이 없으나 이조시대의 도적 떼의 기원은 이성게의 이신벌군의 불의에 분개한 지사들이 도당을 모아 일변 이성계를 따라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소위 양반들의 생명과 재물을 빼앗고 일변 그들이 세우려는 질서를 파괴하여서 불의에 대한 보복을 하려는 데서 나왔으니, 그 정신에 있어서는 두문동 72현과 같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도적이라 하나 약한 백성의 것은 건드리지 아니하고 나라 재물이나 관원이나 양반의 것을 약탈하여서 가난하고 불쌍한 자를 구제함으로써 쾌사를 삼았다. 이 모양으로 나라를 상대로 하기 때문에 자연히 법이 엄하고 단결이 굳어서 적은 무리의 힘으로 능히 500년간 나라의 힘과 겨루어온 것이었다.

이 도적의 떼는 근본이 하나요, 또 노사장이라는 한 지도자의 밑에 있으나 그 중에서 강원도에 근거를 둔 일파를 '목단설'이라고 부르고, 삼남에 있는 것을 '추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 두 설에 속한 자는 서로 만나면 곧 동지로 서로 믿고 친밀하게 되었다. 이 두 설에 들지 아니하고 임시임시로 도당을 모아서 도적질하는 자를 '북대'라고 하는데 이 북대는 목단설과 추설의 공동의 적으로 알아서 닥치는 대로 죽여버리게 되었다.

노사장 밑에는 유사가 있고 각 지방의 두목도 유사라고 하여 국가의 행정조직과 방사하게 전국의 도적을 통괄하였다. 1년에 일차 '대장'을 부르니 이것은 목단설과 추설 전체의 대회요, 또 수시로 '장'을 부르니 이것은 한 설만의 대회였다. 대회라고 전원이 출석하기는 불가능하므로 각 도와 각 군에서 몇 명씩 대표자를 파견하기로 되었는데, 그 대표자는 각기 유사가 지명하게 되는데 한 번 지명을 받으면 절대복종이었다.

이 '장' 부르는 처소는 흔히 큰 절이나 장거리였다. 대소공사를 혹은 의논하고 혹은 지시하여 장이 끝난 뒤에는 으레 어느 고을이나 장거리를 쳐서 시위를 하는 것이었따.

그들이 대회에 참예하러 갈 때에는 혹은 양반으로 혹은 등짐장수로, 혹은 장돌림, 혹은 중, 혹은 상제로 별별 가장을 하여서 관민의 눈을 피하였다. 어디를 습격하러 갈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 세상을 놀라게 한 하동장 습격은 장례를 가장하여 무기를 관에 넣어 상여에 싣고 도적들은 혹은 상제, 혹은 복인, 혹은 상두꾼, 혹은 화장객이 되어서 장날 백주에 당당히 하동 읍내로 들어간 것이었다.

김 진사는 이러한 설명을 구변 좋게 한 후에 내게,

"노 형, 황해도라셨지? 그러면 연전에 청단장을 치고 곡산 원을 죽인 사건을 아시겠구려?"

하기로 아노라고 대답하였더니, 김 진사는 지난 일을 회상하고 유쾌한 듯이 빙그레 웃으며,

"그때에 도당을 지휘한 것이 바로 나요. 나는 양반의 행차로 차리고 사인교를 타고 구종별배로 앞 뒤 벽제까지 시키면서 호기당당하게 청단장에를 들어갔던 것이요. 장에 볼일을 다 보고 질풍신뢰와 같이 곡산읍으로 들이몰아서 곡산 군수를 잡아죽였으니 이것은 그 놈이 학정을 하여서 인민을 어육을 삼는다 하기로 체천 행도를 한 것이었소"

하고 말을 마쳤다.

"그러면 이번 징역이 그 사건 때문이오?"

하고 내가 묻는 말에 그는,

"아니오, 만일 그 사건이라면 5년 만으로 되겠소? 기위 면키 어려울 듯하기로 대단치 아니한 사건 하나를 실토하여서 5년 징역을 졌소이다."

나는 그들이 새 동지를 구할 때에 어떻게 신중하게 오래 두고 그 인물을 관찰하는 것이여, 이만하면 동지가 되겠다고 판단한 뒤에도 어떻게 그의 심지를 시험하는 것이며, 이 모양으로 동지를 고르기 때문에 한 번 동지가 된 뒤에는 서로 다투거나 배반하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며, 장물(도적한 재물)을 나눌 때에 어떻게 공평하다는 것이며, 또 동지의 의리를 배반하는 자가 만일에 있으면 어떻게 형벌이 엄중하다는 것도 김 진사에게 들었다.

인물을 고를 때에는 먼저 눈 정기를 본다는 것이며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동지의 처첩을 범하는 것과 장물을 감추는 것이요, 상 중에 가장 큰 상은 불행히 관에 잡혀가더라도 동지를 불지 아니하는 것이니 이러한 사람을 위하여서는 그 가족이 편안히 살도록 하여준다는 말도 들었다.

김 진사의 말을 듣고 나는 나라의 독립을 찾는다는 우리 무리의 단결이 저 도적만도 못한 것을 무한히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여기서 나는 동지 도인권을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는 본시 용강 사람으로 노백린, 김희선, 이갑 등이 장령으로 있을 때에 군인이 되어서 정교의 자리에까지 올랐다가 군대가 해산되매 향리에 돌아와 있는 것을 양산학교 체육 선생으로 연빙하여와서 우리와 동지가 되어 이번 사건에도 10년 징역을 받고 나와 같이 고생을 하게 된 사람이다. 이때에 옥중에서는 죄수를 모아서 불상 앞에 예불을 시키는 예가 있었는데, 도인권은 자기는 예수교인이니 우상 앞에 고개를 숙일 수 없다 하여 아무리 위협하여도 고개를 빳빳이 하고 있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서 마침내 예불은 강제로 시키지 아니하기로 작정이 되었다.

또 옥에서 상표를 주는 것을 그는 거절하였다. 자기는 죄를 지은 일도 없고 따라서 회개한 일도 없으니 개준을 이유로 하는 상표를 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또 그후에 가출옥을 시킬 적에도 도인권은, 내가 본래 무죄한 것을 지금 와서 깨달았으니 판결을 취소하고 나가라 하면 나가겠지마는 가출옥이라는 '가'자가 불쾌하니 아니 받는다고 버티어서 옥에서도 할 수 없이 형기를 채우고 도로 내보냈다. 도인권의 이러한 행동은 강도로서는 능히 못할 일이라, '만산고목일지청'의 기개가 있었다.

'외외낙락적나라 독보건곤수반아(嵬嵬落樂赤裸裸 獨步乾坤誰伴我:홀로 높고 정갈하여 구애됨이 없으니 천하를 홀로 걸으매 누가 나를 짝하랴)'

하로 한 불가의 구절을 나는 도군을 위하여 한 번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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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다른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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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 도적 목단설과 추설"

그러한 지사들이 비밀리에 연락 혹은 집단하여 가지고, 약한 자를 구제하고 기운 것을 붙들고자(濟弱扶傾) 하는 선의와 질서를 파괴하고자 하는 보복적 대의를 표방하고 구석진 곳에 동지를 소집하였습니다. 조선의 은총과 국록을 먹는 자, 백성을 착취하는 소위 양반이라는 족속과 부유한 자의 재물을 탈취하여 빈한한 백성을 구제하였는데, 나라에서 도적이란 이름을 붙여 가지고 500여 년 동안 압박·도살하여 온 것이외다.”

김진사는 두문동 72현 같은 반체제 세력을 군도의 시원으로 잡고 있는데, 이것은 앞서 보원 스님의 말과 아주 흡사하다. 보원 스님은 “땡추들이 힘을 모으게 된 것은 불국토의 현실화에 대한 열망 못지않게 고려 유민의 망국한이 조선조의 저변을 흐른 까닭”이라며 고려 유민의 망국한을 들고 있지 않은가. 고려 유민과 군도는 어떤 식으로도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다만 김진사는 불교와의 관련성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시 따지기로 하고, 김진사의 말을 더 들어보자.

김진사가 전하는 군도의 조직은 이렇다. 강원도에 근거를 가진 도적을 ‘목단설’이라 하고, 삼남 즉 경상도·전라도·충청도의 도적을 ‘추설’이라 한다는 것이다. 이 외에 ‘북대’라는 것이 있는데, ‘무식한 자들이 임시로 작당하여 민가나 털고 하는 자’를 말한다고 한다. 목단설과 추설의 도당은 서로 만나면 초면이라도 동지로 인정하고 서로 돕지만, 북대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적대시하는 규율이 있어 만나기만 하면 무조건 사형(死刑)에 처했다고 한다.

추설과 목단설, 그리고 북대는 송학이 실토한 내사·외사와 일치하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추설과 목단설을 승려를 중심으로 한 도적 조직으로 본다면, 이것은 송학의 내사에 해당하고, 북대는 외사에 해당한다. 물론 송학이 말한 외사는 원래 내사의 구성원이었다가 떨어져나온 자와 민간인 출신의 강도가 결합한 형태를 띠는 것이라서 약간 차이가 있다. 한데 목단설·추설이 북대를 적대시하여 만나면 무조건 죽인다는 과도한 적개심은 아마도 그들의 조직에서 떨어져나간 존재에 대한 적개심의 표현으로 보인다.

그런가 하면, 추설과 목단설은 앞의 보원·송명초의 증언과도 일치하는 점이 있다. 목단설은 강원도에 근거를 가진 도당이고, 추설은 경상도·전라도·충청도의 도당이다. 지리산은 알다시피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에 걸쳐 있으니, 보원 스님의 말과 일치한다. 이런 자료를 근거로 할 때 도적단에 승려가 어떤 형태로든 관련되어 있다는 것, 또 그들이 중심적 역할을 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물론 추설·목단설이 승려로 조직된 것인데 반해, 김진사의 군도조직은 승려에 관한 말이 없다.

군도의 소굴이 된 사찰

하나 그렇다고 해서 전혀 연결시킬 꼬투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김진사는 추설과 목단설이 1년에 한 번 내부의 공사(公事)를 처리할 때 반드시 큰 시장이나 사찰에서 모인다고 말하고 있다. 이들이 사찰과 관계가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또 김진사의 지휘로 하동(河東) 화개장(花開場)을 털었을 때 쌍계사에서 장물을 분배했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하동 화개장과 쌍계사는 지척지간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쌍계사는 지리산 자락에 있는 절이 아닌가. 이곳은 원래 군도의 소굴이거나 아니면 군도세력과 협력의 관계에 있는 사찰임이 분명한 것이다.

여기서 나는 어렴풋이나마 김진사가 추설(그는 원래 삼남의 ‘불한당’이었다)이고, 곧 지리산계의 땡추와 모종의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찰과 군도와의 관계를 입증하는 자료로 ‘숙종실록’의 자료를 들 수 있다.

“대저 불가(佛家)의 학설은 사람의 심술(心術)을 무너뜨리고,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서 유인하여 사찰(寺刹)이 팔도에 두루 차 있습니다. 양민(良民)의 아들이 군역(軍役)을 피하려고 꾀하여 다투어 모두 머리를 깎고 산에 들어가고, 흉년에 이르러서는 또 도둑 소굴이 됩니다.”(숙종실록 23년 5월18일, 이유제(李惟濟)의 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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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자료가 있는데 더 찾아보니, 김구의 백범일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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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가 만난 불한당의 괴수

1910년 한일합방 직후 신민회(新民會)가 결성되자 백범 역시 참여한 것이 빌미가 되어 이듬해 1월5일 일제 헌병대에게 체포돼 징역17년을 언도받고 서대문 감옥소로 이감된다. 백범은 이때 삼남 불한당의 괴수 김진사로부터 조선 전래의 ‘계통 있는’ 다시 말해 역사적 유래가 있는 도적의 조직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이하, ‘백범일지’는 도진순이 주해한 2002년 발행, 돌베개판에 의한다.)

김구 역시 양산학교 사무실에서 여러 교사들과 함께 지낼 때 이른바 활빈당이니 불한당이니 하는 비밀결사가 마을이나 읍을 약탈하고,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고 하던 것을 연구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활빈당과 불한당은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하는 식으로 민활하였기에 관에서 도저히 잡을 수 없었다고 회상한다. 그는 언젠가 독립운동에 필요한 견고한 조직과 민활한 훈련을 위해 그들의 결사와 훈련을 몇 달 동안 연구하였으나 소득 없이 실패하였다. 김구가 양산학교에 있었던 것은 1909년이다.

강재언의 연구(활빈당 투쟁과 그 사상, ‘근대조선의 민중운동’, 풀빛, 1982)에 의하면 활빈당은 1899년부터 1904년까지 계속된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활빈당이란 이름이 나온 문헌을 증거로 삼았던 것이고 실제로는 이후에도 계속되었을 것은 자명하다.

김진사의 자료는 앞의 ‘황성신문’의 자료와 불과 3년 정도의 차이가 나니, 비교해보면 좋을 것이다. 이 자료를 토대로 하여 조선시대 도둑의 조직과 관습을 추적해보자. 먼저 김진사의 말을 인용한다.

“조선시대 이전은 상고할 수 없으나, 조선시대 이후 도적의 계파와 시원은 이렇습니다. 도적이란 이름부터 명예스럽지 않거든 누가 도적질을 좋은 직업으로 알고 행할 자 있으리오만, 대개가 불평자의 반동적 심리에서 기인된 것이외다. 고려말 이성계가 신하로서 임금을 쳐서(以臣伐君) 나라를 얻은 후, 당시에 두문동(杜門洞) 72현 같은 사람들 외에도 고려 왕조에 충성하고자 하는 뜻을 가지고 있는 자 많았을 것이오.

양대 도적 목단설과 추설

그러한 지사들이 비밀리에 연락 혹은 집단하여 가지고, 약한 자를 구제하고 기운 것을 붙들고자(濟弱扶傾) 하는 선의와 질서를 파괴하고자 하는 보복적 대의를 표방하고 구석진 곳에 동지를 소집하였습니다. 조선의 은총과 국록을 먹는 자, 백성을 착취하는 소위 양반이라는 족속과 부유한 자의 재물을 탈취하여 빈한한 백성을 구제하였는데, 나라에서 도적이란 이름을 붙여 가지고 500여 년 동안 압박·도살하여 온 것이외다.”

김진사는 두문동 72현 같은 반체제 세력을 군도의 시원으로 잡고 있는데, 이것은 앞서 보원 스님의 말과 아주 흡사하다. 보원 스님은 “땡추들이 힘을 모으게 된 것은 불국토의 현실화에 대한 열망 못지않게 고려 유민의 망국한이 조선조의 저변을 흐른 까닭”이라며 고려 유민의 망국한을 들고 있지 않은가. 고려 유민과 군도는 어떤 식으로도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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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도적의 무리 중에 자기들의 유래를 일지매라고 했다는 내용도 있더군요, 위 발췌의 마지막 부분에 "고려 유민과 군도(도적무리)는 어떤 식으로도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라는 부분이 있는데, 이게 사실일지 아니면 도적 무리에 스스로 일종의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함인지는 알 수 없지만, 중국의 반청복명을 위한 조직도 청대까지 실존했다는 기록도 있고..

뭐 여튼 흥미가 가는 소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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