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호

명 칭 : 어물동마애여래좌상(於勿洞磨崖如來坐像)

분 류 : 유물 / 불교조각/ 석조/ 불상

수량/면적 : 3기

지정(등록)일 : 1997.10.09

소 재 지 : 울산 북구  어물동 산122

시 대 : 통일신라

소유자(소유단체) : 울산광역시

관리자(관리단체) : 북구

상 세 문 의 : 울산광역시 북구 문화홍보과 052-219-7553

‘방바위’라고 불리는 거대한 바위에 일광(日光)·월광(月光)보살을 협시로 하는 약사삼존불을 높게 돋을새김한 마애불이다.
모든 중생의 질병을 구제해준다는 중앙의 약사불은 비교적 길쭉한 얼굴로, 이목구비가 약간 마멸되었을 뿐 세련된 모습을 보여준다. 목에는 3개의 주름이 뚜렷하며, 당당한 어깨와 강건한 신체는 통일신라를 대표할 만한 조각 수법을 보여준다. 하지만 마멸이 심한 두 손과 오른쪽 옷주름 등에서는 다소 딱딱해진 면도 엿보인다. 좌우의 협시보살은 약간 모난 듯 긴 얼굴에 원통형 보관(寶冠)을 쓰고 있는데, 이마에 각각 해와 달을 표시하고 있어 일광·월광보살임을 알 수 있다.
바위 뒷면에는 서까래 같은 것을 걸쳤던 자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석굴사원 형식의 공간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마애불은 방바위라 불리는 거대한 바위에 일광(日光)·월광보살(月光菩薩)이 협시(脇侍)하고 있는 약사삼존불(藥師三尊佛)을 높게 돋을새김한 것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 본존인 약사불은 비교적 길게 생긴 느낌을 주는 얼굴인데 이목구비가 약간 마멸(磨滅)되었을 뿐 세련된 모습을 보여준다. 당당한 어깨에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고 강건한 신체는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할만한 조각 수법을 보여주지만 오른쪽 소매의 옷주름과 마멸이 심한 두 손등은 다소 딱딱해진 면도 엿보인다. 좌우 협시보살(脇侍菩薩)은 약간 모난 듯한 긴 얼굴에 원통형 보관(圓筒形 寶冠)을 쓰고 있는데 각각 해와 달을 표시하고 있어서 일광(日光)·월광보살(月光菩薩)임을 알 수 있다. 이 바위 뒷면에 연목(椽木)같은 것을 걸쳤던 자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석굴사원(石窟寺院)형식의 전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글 출처 : 문화재청

 

 

 

 

 

 

 

 

 

 

 

 

 

 

종 목 :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5호

명 칭 : 간월사지(澗月寺址)

분 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사찰

수량/면적 : 1,438㎡

지정(등록)일 : 1997.10.09

소 재 지 : 울산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 512-1

시 대 :

소유자(소유단체) : 울산광역시

관리자(관리단체) : 울주군

상 세 문 의 : 울산광역시 울주군 문화관광과 052-229-7633

간월사는 신라 진덕여왕(재위 647∼654) 때 자장율사가 창건하여 법맥을 이어오다가 임진왜란 때 없어졌다고 한다. 그 후 조선 인조 12년(1634)에 다시 지었다고 하는데 그 후의 내력은 알 수 없다.
현재는 금당지 등의 건물터와 축대 등이 남아있다. 또한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70호)과 2기의 석탑이 남아 있는데, 이들은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여진다. 남아있는 불상과 석탑은 고대 불교미술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글 출처 : 문화재청

절터 근처에 자연석에 남겨진 이름, 이걸 새긴 공덕도 만만히 볼수 없을 듯 하다.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기 전, 어느 분들의 묘 2기가 있었다 한데, 그 흔적인듯…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없었을 때인듯 하지만서도..

새로 만든듯한 범종도 걸려 있고….

종을 치는 통나무 부분은 주변을 온통 점령한 모텔 투숙객들의 새우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함인지, 아니면 그 투숙객들의 호기심을 면하기 위함인지, 쇠사슬에 자물쇠로 방어 중…

종 목 : 사적  제320호 SAM_8868

명 칭 : 울산 병영성(蔚山兵營城)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지

수량/면적 : 60,219㎡ (보호구역1,989㎡)

지 정(등록)일 : 1987.07.18

소 재 지 : 울산 중구  서동 149-8외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자(소유단체) : 국유.공유.사유

관리자(관리단체) : 중구

경상좌도의 병마절도사가 머물던 성으로, 조선 태종 17년(1417)에 쌓은 해발 45m 이하의 낮은 구릉을 이용해 골짜기를 두른 타원형의 성이다.
초기에는 성벽 위에서 담처럼 생겨 몸을 숨긴 채 총이나 활을 쏘는 시설인 여장을 비롯한 기본적인 시설만 갖추었다. 그 후 세종 때에 이르러 국방력 강화를 위해 성을 보호하고 공격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옹성·적대·해자 등 여러 방어시설을 설치했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당시 성의 둘레는 3,723척(약 1.2㎞)이고, 높이는 12척(약 3.7m)이며, 성 안에는 우물·도랑·창고 등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의 영성(營城)이며, 조선시대 성곽연구에 중요한 유적이다.

이 성(城)은 조선전기(朝鮮前期)에 경상좌도병마도절제사영(慶尙左道兵馬都節制使營)이 자리하였던 곳이다. 동남해안방어(東南海岸防禦)와 밀접히 관련된 곳으로 1397년 태조(太祖) 6년에 진(鎭)이 설치되고 1417년 태종(太宗) 17년에 새로이 성을 쌓고 울산군(蔚山郡)의 치소(治所)도 이곳에 두었다.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 의하면 둘레가 3,732척(尺)이고, 성벽 높이는 9척(尺)이었으며, 우물 7군데와 소거(小渠) 2개가 있어 사철 마르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해발 45m 이하의 낮은 구릉(丘陵)을 이용하여 팔자(八字)모양으로 뻗은 곡구(谷口)를 에워싸고 있어 전체의 평면모양이 타원형을 이룬다. 그 후 세종(世宗)·문종대(文宗代)에 이르러 성벽의 방어력을 대대적으로 증강시키는 연해지역(沿海地域)의 방어시설(防禦施設) 정비계획(整備計劃)에 의해 적대(敵臺)·옹성(甕城)·해자(垓字)·여장(女墻)의 시설이 보완되기에 이르렀는데, 15세기 중엽의 상태는 성벽높이는 8척(尺)이고 여장(女墻)높이가 3척(尺)이었다.
적대(敵臺 : 치성(雉城))는 모두 21개(個)가 계획되었으나 18개가 마련되었었다. 이 적대(敵臺)는 최근의 발굴조사에 의하여 길이와 너비가 8m씩의 네모꼴임이 밝혀졌다. 4개의 문(門)에는 모두 옹성(擁城)이 만들어졌으며, 여장(女墻)은 908개였다.
성안에는 우물 11개와 샘 3개가 있었고, 성벽을 따라 돌아가면서 밖으로 해자(垓字)가 파여지고 있었다. 해자(垓字)는 성벽에서 바깥으로 10m쯤 간격을 두고 마련되었으며 폭 8m, 깊이 2m의 규모였다.
이 성터는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 왜군(倭軍)이 부근에 주둔하면서 왜성(倭城)을 쌓을 때에, 성석(城石)을 거의 이곳에서 가져다가 쌓았으므로 폐허화 되었다. 성의 안팎에 민가(民家)가 조밀하게 들어서면서 성의 남문터는 옹성의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으나, 북문(北門)·동문(東門)·서문(西門)의 옛터는 옹성(擁城)의 흔적을 조금씩이나마 남기고 있다. 군데군데에는 적대(敵臺)의 흔적이 기단부(基壇部)만 남아있고, 해자(垓字)는 메워져서 거의 경작지로 변하였다.
성벽은 바깥에서는 커다란 할석(割石)으로 안쪽으로 경사를 이루며 쌓아 올리고, 성벽 속은 불규칙한 돌덩이를 채우고 있다. 바깥쪽으로는 성벽 아래에 좀더 내밀어서 기단을 마련하여 성벽이 경사로 말미암아 밀려남을 예방하듯 축조하였다. 성벽의 안쪽 경계선도 비교적 커다란 할석으로 마무리하여 내외협축(內外夾築)의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조선시대 특유한 읍성축조방식과 동일(同一)한 축조방법에 속한다. 성벽의 폭은 7m이고 안팎의 벽면 사이는 적심석을 채우되 가장자리는 열(列)을 이루어 바깥의 성벽이 무너져도 적심(積心)은 손상되지 않도록 고려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글 출처 : 문화재청

 

지금 병영성은 복원 공사가 한창이다. 길가에 있는 안내판은 교체 작업을 위해서 뽑아내는 중이었고,
곳곳에 석재들과 토사들이 쌓여 있었다.

따뜻한 봄이 오면 제대로 복원된 병영성을 만나 볼 수 있을까…

SAM_8866SAM_8867SAM_8868SAM_8869SAM_8870SAM_8871SAM_8872SAM_8873SAM_8874SAM_8875SAM_8876SAM_8877

주말, 할일도 없던 차에  태화사지 십이지상 부도를 구경하러 학성 공원으로 향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당당하게 학성공원내에 있다고 하니까..

아직도 빙판이 깔려 있는 좁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일단 안내 표지판으로 고고..

그래 아직 꼭데기에 잘 있는구나.. 겨울 바람 시린 무릎이 통증을 호소하지만 꾹 참고 높은 계단을 올라 올라….. 어라?

부도가 있어야 할 자리에.. 왠지 불길한 예감…

 

영구 보존 관리를 위해 울산 박물관으로 이전.. 작년 11월에 말이죠..

울산 박물관은 올해 6월 개관 예정이라고 하니깐, 이 대단한 부도를 6월이나 되어야 볼 수 있는거네요..

 

아 춥다…

종 목 : 보물  제173호

명 칭 : 울주 망해사지 승탑(蔚州 望海寺址 僧塔)

분 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탑

수량/면적 : 2기

지정(등록)일 : 1963.01.21

소 재 지 : 울산 울주군  청량면 율리 산16-3

시 대 : 통일신라

소유자(소유단체) : 국유

관리자(관리단체) : 울주군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 이 2기의 부도는 망해사의 법당 북쪽에 동·서로 자리하고 있는데, 동쪽 부도는 파손되어 있던 것을 1960년 11월 복원한 바 있다. 서로 규모와 양식이 같으며, 각 부분이 8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탑신(塔身)을 받치는 기단(基壇)은 3개의 받침돌로 이루어져 있다. 아래받침돌은 8각으로 구성하고, 그 위로 연꽃무늬를 조각한 돌을 올렸으며, 가운데받침돌은 높은 8각의 단 위에 다시 낮은 3단이 층을 이뤄 받치고 있다. 윗받침돌은 옆면에 16잎의 연꽃잎을 이중으로 조각하였는데 그 모양이 화사하다.
탑신은 각 면마다 창의 형태를 새겼고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으며, 4면에는 문짝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처마와 추녀가 수평으로 넓으며, 각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았던 작은 구멍들이 있다. 꼭대기의 머리장식 부분은 두 탑 모두 없어졌으나, 그 일부가 별도로 보관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전체적인 구성이나 조각수법이 다소 빈약하지만 각 부의 비례가 보기좋은 아름다운 작품이다.

 

파손 부위

 

정체가 불분명한 석재

글 출처 : 문화재청

t2

종 목 : 보물  제382호

명 칭 : 울주 청송사지 삼층석탑(蔚州 靑松寺址 三層石塔)

분 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탑

수량/면적 : 1기

지정(등록)일 : 1963.01.21

소 재 지 : 울산 울주군  청량면 율리 1420

시 대 : 통일신라

소유자(소유단체) : 국유

관리자(관리단체) : 울주군

남암산 아래에 있는 청송사 절터에 있는 삼층석탑이다.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기단은 각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을 새기고, 마감돌 위에 다른 돌로 2단의 모난 괴임돌을 끼워서 각각 윗돌을 받치도록 하였다. 탑신(塔身)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1층 몸돌이 특히 길고 크며, 2층 몸돌은 급격히 줄어들었고, 각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이 있고, 추녀가 두꺼워 지붕 네 귀퉁이의 치켜올림이 약하며 처마는 수평으로 길이가 짧다. 꼭대기에는 머리 장식을 받치는 노반(露盤)만 남아 있다.
이 탑은 기단의 짜임새가 정연하지 못하고, 1층 몸돌이 지나치게 큰 반면 지붕돌이 작아서 좋은 비례로 보기 어려우나, 지방에 분포된 신라 석탑의 한 예로 주목할 만하다. 또한 1층 몸돌의 괴임돌이 다른 돌로 되어 있는 점은 탑의 특이한 조형과 아울러 9세기 이후에 조성된 것을 짐작하게 한다.

 

1962년 해체, 수리할 당시 위층 기단에서 동제사리함이 발견되었다. 그 안에 청동여래입상 1구를 비롯하여 유리구슬 16점, 수정으로 만든 곱은옥 1점, 관옥 1점 등 30여 점이 발견되었다.

info3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에 건립된 석탑(石塔)으로 기단(基壇) 일부가 파손된 채 묻혀있던 것을 1962년에 해체(解體) 복원(復元)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되었다. 해체할 때 상층기단(上層基壇)에서는 청동(靑銅)으로 만든 여래입상(如來立像) 1구(軀)를 비롯하여 유리(琉璃)·구슬·수정(水晶)·옥(玉) 등 30여 점이 들어 있는 사리함(舍利函)이 발견되었다. 기단(基壇)의 구성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또한 1층의 탑신(塔身)은 지나치게 크면서 지붕돌인 옥개석(屋蓋石)은 작아 탑의 비례면(比例面)에서 볼 때 좋은 것이라고는 볼 수는 없으나, 지방의 신라 석탑(石塔)으로는 주목되는 유물 중의 하나이다.

t1t4t5t6t7t3b1b2bu1bu2info1

글 출처 : 문화재청

+ Recent posts